당신 시간의 알찬 소비  ·  당신 주변의 변화를 관찰합니다

1부 땅이 묻다

02

강이 차려준 식탁, 물을 찾아 차린 식탁

이집트와 이란, 물이 결정한 두 개의 부엌

기원전 2500년 무렵, 나일강 서쪽 기자 고원의 새벽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거대한 돌산 아래, 흙벽돌로 지은 마을이 있습니다. 긴 막사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사이 좁은 골목에서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빵 굽는 곳입니다. 종 모양의 두꺼운 토기 틀이 불씨 위에서 달궈지고, 사람들은 그 안에 발효된 반죽을 붓습니다. 옆 건물에서는 큰 항아리마다 곡물 죽이 부글거리며 시큼한 냄새를 풍깁니다. 맥주를 빚는 중입니다.

이 빵과 맥주는 피라미드를 짓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이 마을의 일꾼들은 조를 짜서 일했는데, 이들이 돌에 남긴 낙서 가운데는 스스로를 '멘카우레의 친구들', '멘카우레의 술꾼들'이라고 부른 조 이름이 전해집니다. 고고학자들은 이 마을의 쓰레기 더미에서 엄청난 양의 곡물 흔적과 소뼈를 찾아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는 빵 굽는 연기 속에서 올라갔습니다.

이번에는 동쪽으로 2,000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이란 고원의 사막 도시 야즈드 외곽을 떠올려보겠습니다.

강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누런 평원 위로 흙무더기들이 한 줄로 길게 이어집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거대한 짐승의 발자국 같습니다. 그 줄이 끝나는 곳, 땅 밑에서 물이 흘러나와 수로를 채웁니다. 그 수로를 따라 석류나무와 피스타치오 나무가 자라고, 그 옆에 마을이 있습니다. 이 물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산기슭에서 땅속 터널을 타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한쪽은 강이 식탁을 차려주었습니다. 다른 한쪽은 사람이 물을 찾아내 식탁을 차렸습니다.


이집트의 이야기는 사실 사막의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지금의 사하라는 지구에서 가장 큰 뜨거운 사막이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약 1만여 년 전부터 5천 년 전 무렵까지, 북아프리카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연구자들이 '아프리카 습윤기'라고 부르는 시기입니다. 지금 모래뿐인 곳에 호수와 초원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사냥하고 가축을 치고 야생 곡물을 거뒀습니다. 사하라의 바위에는 지금은 사라진 그 초원의 기억이 소와 기린의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다 비가 줄어들었습니다. 초원은 천천히 말라붙었고, 사람들은 물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여러 연구자들은 이 기후 변화가 사람들을 점점 나일강 유역으로 모이게 했고, 그것이 이집트 문명이 한 줄기 강을 따라 응축된 배경 가운데 하나였다고 봅니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는 아직 논쟁 중이지만, 방향은 분명합니다. 사막이 넓어질수록 강의 가치는 커졌습니다.

그 강에는 특별한 성질이 있었습니다.

한 입 과학 — 스스로 비료를 주는 강
나일강 물의 상당 부분은 멀리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옵니다. 매년 여름 이 고원에 몬순 비가 쏟아지면, 불어난 물이 청나일을 타고 북쪽으로 흘러 이집트에 닿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한여름에 강이 넘쳤습니다. 이 물은 고원의 흙을 잔뜩 싣고 왔습니다. 범람이 물러간 뒤 들판에는 광물질이 풍부한 검은 진흙이 얇게 깔렸습니다. 해마다 새 흙이 배달되는 셈이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자기 땅을 '검은 땅'이라는 뜻의 '케메트'라고 부른 것도 이 진흙의 색 때문이었습니다.

이 리듬 위에서 이집트의 농사력이 짜였습니다. 물이 들어오는 계절, 물이 빠진 진흙에 씨를 뿌리는 계절, 그리고 거두는 계절. 세 계절입니다. 물이 빠지면 농부들은 축축한 진흙에 보리와 엠머밀을 뿌렸고, 강이 다시 불어나기 전에 수확을 끝냈습니다. 이집트의 식탁은 강의 달력에 맞춰 차려졌습니다.

그리고 그 곡물은 두 가지 형태로 식탁에 올랐습니다. 빵과 맥주입니다.

같은 곡물이 두 가지 음식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곡물의 녹말은 그 자체로는 효모가 먹을 수 없습니다. 곡물을 싹 틔우면 그 안에서 효소가 깨어나 녹말을 당으로 쪼갭니다. 그 당을 효모가 먹으면 알코올과 이산화탄소가 생깁니다. 이산화탄소를 반죽 안에 가두면 빵이 부풀고, 알코올을 액체 안에 남기면 맥주가 됩니다. 빵과 맥주는 같은 원리의 두 얼굴이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맥주는 오늘날의 맑은 맥주와 전혀 달랐습니다. 걸쭉하고, 곡물 건더기가 떠 있고, 도수는 낮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시는 빵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 맥주는 기호품이 아니라 식량이었고, 식량이었기에 곧 임금이었습니다. 국가가 거대한 공사를 벌일 때 일꾼들에게 나눠준 것이 바로 빵과 맥주였습니다. 기자의 노동자 마을은 제빵소와 양조장과 곡물창고를 품은 거대한 부엌이었습니다.

이 마을의 발굴은 피라미드를 둘러싼 오래된 상상 하나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채찍 아래에서 돌을 끌던 노예의 이미지입니다. 고고학자 마크 레너가 이끈 발굴단은 마을의 쓰레기 더미에서 수많은 소뼈를 찾아냈습니다. 소는 기르는 데 비용이 많이 들어 대개 부유한 사람의 고기로 여겨집니다. 곡물도 이미 껍질을 다 벗겨 손질된 상태로 대량 반입된 흔적이 나왔습니다. 발굴단은 이 쓰레기를 두고 값비싼 생활 방식의 흔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일꾼들은 전국의 마을에서 교대로 징발되어 온 사람들이었고, 국가는 그들을 먹이는 데 막대한 공을 들였습니다. 물론 징발된 노동은 자유로운 선택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식탁은, 국가가 이 노동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말해줍니다. 피라미드는 채찍보다 빵으로 쌓였습니다.

강이 흙을 주고, 흙이 곡물을 주고, 곡물이 빵과 맥주가 되고, 빵과 맥주가 피라미드를 세웠습니다. 이집트 문명의 순환은 식탁 위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이란 고원에는 그런 강이 없었습니다.

이 고원의 중앙부는 거대한 분지이고, 연간 강수량이 매우 적은 사막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대신 분지를 둘러싼 산맥에는 겨울 동안 눈이 쌓였습니다. 봄이 되면 그 눈이 녹아 산기슭의 자갈과 모래층, 즉 충적층 아래로 스며들었습니다. 물은 있었습니다. 다만 땅 밑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 고원의 사람들은 그 물을 꺼내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카나트입니다.

카나트는 산기슭 지하수층에 깊은 우물을 먼저 파고, 거기서부터 아주 완만한 기울기의 터널을 마을 쪽으로 파 나가는 구조입니다. 펌프는 없습니다. 오직 중력만으로 물이 흘러갑니다. 터널을 파는 동안 흙을 꺼내고 공기를 통하게 하려고 일정한 간격마다 수직 갱도를 뚫었는데, 야즈드 외곽 평원에 줄지어 선 흙무더기가 바로 이 갱도의 입구입니다. 땅 위로 물을 끌어오면 뜨거운 햇볕에 증발해버리지만, 땅 밑으로 끌어오면 물은 거의 줄지 않고 도착합니다.

이 기술은 수천 년 동안 이란 고원의 삶을 떠받쳤습니다. 2016년 유네스코는 이란 곳곳의 카나트 11개를 묶어 '페르시아 카나트'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올렸습니다. 이란 정부는 지금도 이 나라에 3만 개가 넘는 카나트가 있는 것으로 추산합니다. 유네스코가 특히 주목한 것은 터널 자체보다 물을 나누는 방식이었습니다. 누가 언제 얼마만큼 물을 받을지를 정하는 공동체의 관리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을 찾아낸 곳에서, 물은 분배의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 분배가 이 땅의 식탁을 빚었습니다.


물이 귀한 땅에서 사람들은 한 방울로 가장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식물을 골랐습니다. 석류, 피스타치오, 살구, 포도, 무화과. 깊이 뿌리를 내리고 건조함을 견디는 나무들입니다. 카나트의 물줄기 끝에는 담을 두른 과수원이 생겨났습니다. 고대 이란의 언어에서 담장을 두른 정원을 가리키던 말이 그리스어를 거쳐 오늘날 '파라다이스'라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물이 흐르는 정원은 말 그대로 낙원의 원형이었습니다.

그 정원의 열매들이 이란 음식의 성격을 만들었습니다. 석류즙을 오래 졸인 새콤한 당밀, 소금물에 삶아 햇볕에 말린 라임, 덜 익은 포도에서 짜낸 신 즙. 이란 요리를 맛보면 고기 스튜에 과일의 신맛이 깊게 배어 있는 것을 자주 만납니다. 석류 당밀과 호두를 오래 끓인 스튜 페센잔이 대표적입니다. 과수원의 산미가 고기의 무게를 받쳐주는 구조입니다.

쌀도 그렇습니다. 이란의 쌀은 비가 많은 카스피해 연안에서 주로 났습니다. 고원 한가운데에서 쌀은 귀한 곡물이었고, 그래서 한 알 한 알을 정성 들여 다뤘습니다. 쌀을 불리고 삶았다가 다시 쪄서 낟알이 하나하나 흩어지게 짓고,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황금빛 누룽지 타흐디그를 가장 귀한 부분으로 대접합니다. 한국인에게는 익숙한 즐거움이, 사막 고원에서는 전혀 다른 경로로 완성되었습니다.

사막의 더위를 다루는 기술도 있었습니다. 이란의 오래된 마을들에는 '야흐찰'이라 불리는 흙 돔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겨울밤, 얕은 수로에 물을 흘려 얼리고, 그 얼음을 두꺼운 흙벽 아래 깊은 구덩이에 보관해 여름까지 쓰던 얼음 창고입니다. 이 방식이 정확히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문헌 근거가 충분하지 않아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추정이 엇갈립니다. 하지만 사막 한가운데서 여름에 얼음을 꺼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땅의 사람들이 물을 다루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을 쏟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얼음과 과수원의 열매가 만나 태어난 음료가 있습니다. 과일즙이나 꽃물에 설탕을 넣고 차갑게 식혀 마시는 샤르바트입니다. 이 페르시아어 단어는 오스만 제국을 거쳐 유럽으로 건너가 영어의 셔벗, 프랑스어의 소르베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디저트 가게의 얼린 과일 디저트 이름에는, 물을 아끼고 얼음을 모으던 사막 도시의 기억이 들어 있는 셈입니다. 음식이 국경을 넘으며 이름을 바꿔 달고 퍼져 나가는 이야기는 3부에서 본격적으로 따라가게 됩니다.


두 부엌을 나란히 놓아보겠습니다.

이집트의 식탁은 달력의 식탁이었습니다. 강이 언제 넘치고 언제 물러나는지를 아는 것이 곧 먹고사는 법이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강의 리듬을 읽는 눈과, 그 리듬에 맞춰 수많은 사람의 노동을 조직하는 힘이었습니다. 그 힘이 곡물을 모으고, 빵과 맥주로 바꾸고, 다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이란의 식탁은 분배의 식탁이었습니다. 물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찾아내고, 한정된 물을 누구에게 얼마나 나눌지를 정하는 것이 곧 먹고사는 법이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땅속을 읽는 기술과, 그 물을 다투지 않고 나누는 합의였습니다. 그 합의가 과수원을 만들고, 과수원의 신맛이 요리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 대비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집트도 운하를 파고 제방을 쌓아 강을 다듬었고, 이란에도 강이 흐르는 비옥한 평야가 있었습니다. 받은 물과 찾아낸 물은 두 문명의 전부가 아니라, 각자의 식탁에 가장 깊은 흔적을 남긴 조건입니다.

어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음식이 마신 물의 역사를 먹는 일이기도 합니다. 물이 어디서 오고, 누가 그 물을 관리하고, 그 물이 얼마나 귀했는지가 한 접시 안에 녹아 있습니다.


다시 기자의 노동자 마을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해가 지고, 일꾼들이 막사로 돌아옵니다. 종 모양 토기에서 꺼낸 두툼한 빵이 나눠지고, 항아리의 맥주가 잔에 채워집니다. '멘카우레의 술꾼들'은 오늘도 자기 몫을 받습니다. 이 빵에는 에티오피아 고원의 비가, 그 비가 실어 온 검은 흙이, 그 흙에 씨를 뿌린 농부의 계절이 들어 있습니다.

같은 저녁, 야즈드 외곽의 마을에서는 카나트의 물이 흘러나오는 수로 옆에서 누군가 석류를 쪼갭니다. 붉은 알갱이가 그릇에 쏟아집니다. 이 석류는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산의 눈이, 땅속 어둠을 지나, 사람들의 약속을 따라 이곳까지 흘러온 결과입니다.

한쪽의 빵은 강이 준 선물이었고, 한쪽의 석류는 사람이 지켜낸 약속이었습니다.

강은 풍요를 만들었고, 물길은 질서를 만들었고, 두 식탁은 각자의 방식으로 사막을 이겨냈습니다.